주로 창업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하는 ‘액셀러레이터(창업기획자)’ 가운데 '제피러스랩'이 누적 투자금액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누적 피투자기업 수는 다른 액셀러레이터들에 비해 적은 편이다. 특히 보릿고개를 넘는 소수의 유망 기업에 큰 규모의 금액을 지원하는 전략이 특징이다.

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가 지난달 발표한 ‘2022년 대한민국 액셀러레이터 산업분석 리포트’에 따르면, 전체기업(업력 0~28.3년) 및 초기기업(업력 3년 미만) 누적(2017~2022년) 투자금액 1위를 차지한 액셀러레이터는 제피러스랩이다. 누적 투자금액은 각각 1195억원과 1155억원이다.

그 뒤를 이은 액셀러레이터들과 비교했을 때 1000억원을 넘긴 곳은 제피러스랩뿐이다. 전체기업 및 초기기업 누적 투자금액 3위 안에 드는 곳들의 설립일을 나열해보면 퓨처플레이 2013년, 블루포인트파트너스 2014년, 슈미트 2017년 4월, 제피러스랩 2017년 9월 순이다.

 

(사진=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사진=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사진=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사진=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이러한 가운데 전체기업 및 초기기업 누적 피투자기업 수로 봤을 때 제피러스랩은 상위 30개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제피러스랩은 20여개 기업에 투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체기업 누적 피투자기업 수 기준 30위는 한양대학교기술지주회사로 51개다.

리포트에서 또 눈에 띄는 점이 제피러스랩이 투자한 기업의 업종이다. 전체기업 누적 투자금액 상위 10개사가 투자한 상위 3개 업종에 공통적으로 ‘ICT서비스’가 포함됐다. 하지만 제피러스랩만 ‘ICT제조’ 분야에 투자했다. 물론 비중을 보면 ‘유통/서비스’ 업종에 대한 제피러스랩의 투자가 84.5%로 가장 많다. ICT제조 분야 투자 비중은 10.1%다.

 

(사진=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사진=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

 

(사진=한국표준산업분류코드)
(사진=한국표준산업분류코드)

 

제피러스랩이 상대적으로 소수의 기업에 다소 큰 규모의 금액을 베팅하고 있는 건, 일반적인 액셀러레이터와 다른 모습이다. 액셀러레이터는 보통 극초기 창업 기업을 발굴해 시드 자금을 투자하고, 해당 기업을 육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직접 지분 투자를 하기도 하지만, 자금을 모아 조합을 구성해 여러 기업에 소규모 자금을 뿌리는 분산투자방식이 대체적이다.

제피러스랩이 큰 규모의 자금을 조달해올 수 있었던 건 구성원의 이력이 영향을 끼쳤단 분석이다. 30여년 간 기업 경영 컨설팅 및 M&A(인수합병), 회계·재무·세무 자문 등을 수행한 파트너들이 모여 설립한 곳이 제피러스랩이다. 서영우 대표는 글로벌 회계법인과 사모펀드(PEF) 운용사 등을 거쳤다. 기업 M&A·Buyout(바이아웃, 부실기업 경영권을 인수해 기업가치는 높여 파는 것), 인큐베이팅·컨설팅 등이 전문이다. 지난해엔 하나생명보험 대표이사를 역임한 주재중 전략고문을 영입하기도 했다.

해당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액셀러레이터로서 창업 기업을 육성한다는 목적성을 갖고 있지만 대표가 PE 업계에 있으면서 큰 규모의 국내외 자금을 모아 투자해온 경력이 있기 때문에 자금 조달 면에서 다른 액셀러레이터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이다”며 “이는 모태펀드 출자뿐 아니라 최근 자금 조달 능력을 더 까다롭게 보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 선정 등에서도 유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고 설명했다.

개인투자조합과 벤처투자조합 결성 금액의 상한선은 없다. 최소 결성금액은 있다. 개인투자조합은 1억원 이상, 벤처투자조합은 액셀러레이터의 경우 10억원 이상이다. 다만 액셀러레이터는 초기기업에 대한 의무 투자 비율이 있다. 일반 VC와 다른 액셀러레이터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초기기업을 선발해 사업 및 기술 개발뿐 아니라 시설 및 장소 확보 등의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진=제피러스랩)
(사진=제피러스랩)

 

올 초 제피러스랩은 정책금융기관인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이 공고한 ‘프론트원 펀드 3차 출자사업’에 ‘하나벤처스’와 공동위탁운용사(Co-GP)로 선정돼 150억원 규모의 '하나-제피러스 프론트원 스타트업펀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현재 하나벤처스의 운용자산 규모는 8410억원, 누적 투자금액은 4269억원, 투자 포트폴리오 수는 149개다.

한 곳을 뽑는 공고에 마그나인베스트먼트(VC), 마젤란기술투자(VC), 스마트스터디벤처스(더핑크퐁컴퍼니 CVC, 기업형벤처캐피탈), 아이피파트너스(VC)-비엠벤처스(VC), 어니스트벤처스(VC), 플랜에이치벤처스(호반그룹 CVC) 등이 제안서를 제출했지만 제피러스랩이 선정됐다.

제피러스랩은 기업들로부터 출자를 많이 받아, SI(전략적투자자) 성격의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고도 전해진다. 지난해 말엔 ‘KG스틸’이 ‘제피러스랩 모빌리티 벤처투자조합 13호’에 출자하기도 했다. KG스틸은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KG그룹의 또 다른 자회사인 철강제조기업이다.

제피러스랩은 현재 13개 조합(개인투자조합 4개, 벤처투자조합 9개)을 운용하고 있다. 투자 포트폴리오를 대부분 대외적으로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공개하고 있는 대표적 포트폴리오 가운데 하나가 반도체 설계 솔루션 스타트업인 ‘세미파이브(SemiFive)’다. 제피러스랩은 세미파이브에 160억원 규모의 투자를 시리즈B 단계에 진행했다. 2019년 설립된 세미파이브의 누적 투자 유치 금액은 2400억원 수준이다.  

 

(사진=세미파이브)
(사진=세미파이브)

 

이처럼 제피러스랩은 극초기 창업기업뿐 아니라 이미 투자를 받은 똘똘한 기술 기반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스타트업이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창업 3~7년)을 극복할 수 있도록 자금을 크게 지원하면서, 끌어주는 형태의 전략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피러스랩 관계자는 “투자 기업 수를 늘리기보다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기업에 투자금을 크게 넣는 편이다”면서 “그래서 다른 액셀러레이터들보다 투자 기업 수가 조금 적을 수밖에 없지만, 초기 창업기업에도 작은 규모로 다양하게 투자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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