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조원의 투자자산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자산의 환헤지 비율을 일시적으로 10%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환율 안정을 위해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기금이 협조해야 한다는 정부 요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공단은 16일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환헤지 비율을 기존 0%에서 시장 상황에 따라 최대 10%까지 한시적으로 상향하기로 심의·의결했다. 국민연금은 “환율 급등 이후 안정화에 따른 환손실에 대비할 필요가 있어 해당 안건을 상정·논의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기간은 공개하지 않았다.

국민연금은 2014년부터 단계적으로 환헤지 비율을 줄여 2018년부터는 환율 변동에 그대로 노출하는 ‘환오픈’ 전략을 유지해왔다. 미국 달러, 유로화, 엔화 등 여러 통화에 분산 투자하는 만큼 높은 헤지 수수료를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헤지가 이뤄진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올해 들어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불거졌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늘릴 때마다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여 환율 상승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환헤지 비율을 10%로 끌어올리면 외환시장에 350억~400억달러를 추가 공급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민연금, 5년 만에 환헤지 재개…"400억弗 공급 효과로 외환시장 안정 기대"

국민연금은 최근까지 환오픈 전략을 고수해왔다. ‘경제성장세와 투자 자산 간 자연적인 상쇄 효과를 고려할 때 2030년까지는 환오픈 전략을 유지하는 게 수익률에 더 유리하다’는 국민연금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지난 7월 기금운용위원회에 보고하기도 했다.

태도를 바꾼 건 환율 안정을 내건 정부의 직접적인 요청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이 기존 해외 자산에 대한 환헤지 비율을 확대하는 방안을 각 주무 부처가 기관에 요청하도록 하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이 환헤지 비율을 상향하면 시장에는 달러 공급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환헤지를 위해 달러 선물환을 매도하면 이를 사들인 은행이 달러 매도·매입 포지션을 맞추기 위해 시장에서 달러 현물환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달러 공급 증가는 원·달러 환율 하락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일각에선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환헤지 도입으로 기금 수익률이 하락하면 책임 공방으로 번질 수 있다는 얘기다. 기금 운용 규모를 감안할 때 대규모 외화 선물환 거래를 소화해줄 곳은 한국은행뿐인데, 정작 한국은행과의 공조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현실적 문제도 제기됐다. 국민연금은 이에 대해 “기금위원들도 이례적인 환율 상승이 다시 발생할 경우 안정화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외환 익스포저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강조했다.

기금위는 이날 목표초과수익률을 기존 0.22%포인트에서 0.20%포인트로 낮추는 방안도 의결했다. 목표초과수익률은 기금운용본부가 시장(벤치마크) 수익률을 초과해 달성해야 하는 수익률의 목표치다. 국민연금은 2018년 0.20%포인트였던 목표초과수익률을 2019년 0.22%포인트로 한 차례 올린 뒤 유지해왔다. 지난해에도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금융시장 불안으로 목표수익률을 조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동결을 결정한 바 있다.

기금위에 정통한 관계자는 “경기 전망이 밝지 않으니 수익률을 위해 과도하게 리스크를 감수하면 안 된다는 데 대다수 위원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