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출처 :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물이 빠지면 누가 진짜인지 드러난다.’ 글로벌 투자 한파에 장밋빛 전망으로 투자금을 채워온 스타트업들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투자금이 넘쳐나던 지난해와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지난 6월 9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는 대한민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오늘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스타트업 얼라이언스가 주최한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에 모인 140여개 스타트업 유관기관 관계자 300여명은 글로벌 투자환경의 위축이 스타트업 생태계의 역동성에 다소간의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기술력으로 무장한 MZ세대와 그들의 도전을 뒷받침하는 모험자본에는 오히려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잠깐,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라니. 스타트업 뒤에 붙어있는 ‘생태계’라는 단어가 낯설다. 생태계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그런 단어를 스타트업에 붙여 쓴 것은 스타트업이라는 실험조직의 성공은 이를 지원하는 조직과의 유기적 협력이 필수적임을 담고 있다. 스타트업은 성공을 위해 수많은 허들을 넘어야 한다. 과거의 성공방정식이 오늘날 작동한다는 보장도 없다. 투자사, 지원기관, 정부, 연구소, 미디어 등으로 구성된 스타트업 생태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금 시장을 관통하는 성공방정식을 찾아야 한다. 스타트업의 성공을 위해 똘똘 뭉친 스타트업 생태계는 한 나라와 지역의 경제를 바꾸는 힘을 발휘한다.

미국의 콜로라도주 볼더는 로키산맥 산기슭에 있는 인구 10만명의 작은 대학 도시였다. 하지만 스타트업 생태계가 자리 잡고 난 후 볼더는 천연자원의 발굴이나 대기업 유치 없이도 미국 내 1인당 국내총생산 11위를 차지하는 스타트업 도시로 변모했다. 잘 짜인 스타트업 생태계가 도시의 풍경을 바꾼 것이다. 우리는 어디쯤 왔을까. 이번 컨퍼런스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스타트업 생태계의 오늘을 짚어보기로 한다.

 

스타트업 엑시트 사례가 증가했다

2019년 10월, 설립된 지 6년 차인 한국 AI(인공지능) 스타트업 ‘수아랩(SUALAB)’이 미국 나스닥 상장기업 코그넥스(Cognex)에 매각됐다. 당시 매각가는 1억9500만달러(매각 시 환율 기준 약 2300억원)로 국내 기술 스타트업의 해외 M&A(인수·합병) 사례 중 최대 규모였다. 수아랩 이전에 해외 기업이 우리나라 기술 스타트업을 인수한 사례로는 인텔의 올라웍스 인수(매각가 약 350억원)와 미국 탭조이의 파이브락스 인수(매각가 400억원)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례는 서막에 불과했다. 2021년 2월 글로벌 영상 메신저 ‘아자르’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하이퍼커넥트가 데이팅앱 ‘틴더’ 운영사이자 미국 나스닥 상장사 매치그룹에 2조원에 매각됐다. 이후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와 합병을 발표했고, 합병 발표 시 인정받은 최종 기업가치는 약 57억유로(약 7조6800억원)였다.

해외 기업의 국내 스타트업 인수뿐 아니라 IT 대기업의 스타트업 인수 사례도 증가했다. 카카오는 이커머스 시장의 확장을 위해 패션쇼핑앱 지그재그와 라이브커머스 그립을 인수했고, 콘텐츠 시장 공략을 위해 영어교육서비스 야나두와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 웹툰 플랫폼 타파스미디어를 인수했다. 대기업 역시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스타트업 인수에 나섰다. 신세계그룹은 패션쇼핑플랫폼 W.CONCEPT을 인수했고, GS리테일은 펫쇼핑플랫폼 펫프렌즈, 간편식 플랫폼 쿠캣마켓과 배달음식플랫폼 요기요를, 롯데쇼핑은 중고거래플랫폼 중고나라를 인수했다. 유니콘 스타트업들의 스타트업 인수는 스타트업 생태계의 선순환을 증명하는 기분 좋은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패션쇼핑플랫폼 무신사는 패션쇼핑플랫폼 스타일쉐어와 자회사 29㎝를 함께 인수했고, 야놀자는 호텔예약 플랫폼 데일리호텔과 웨이팅서비스 기업 나우버스킹을, 직방은 부동산 관련 스타트업인 호갱노노와 우주, 네모를 인수해 서비스를 확장했다. 성공적인 엑시트를 경험한 창업가들은 새로운 도전에 나서 스타트업 생태계의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당근마켓의 김재현 공동대표는 씽크리얼스를 창업해 카카오에 매각한 후 두 번째 창업에도 성공해 유니콘기업으로 키워냈다. 호갱노노를 창업한 심상민 대표는 회사를 직방에 매각한 후 온라인 카페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호갱노노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온라인 카페서비스 카페노노를 창업했다. 창업과 엑시트에 이어 재창업을 이어가고 있는 창업가, 그러한 창업가의 성공과정을 함께한 스타트업 생태계는 이렇게 성공의 동심원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10억 이상 투자 유치 기업이 증가했다

2022년 5월 기준 누적투자 10억원 이상을 유치한 스타트업의 수는 1400개가량이다. 2015년 10월 기준 80개사였던 것에 비하면 18배가량 증가한 수치다. 이러한 숫자는 2016년 총 2조1000억원 수준이던 벤처투자 자금이 지난해에는 7조6800억원까지 증가했기에 가능한 결과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유니콘기업도 3곳에서 18곳으로 증가했다. 물론 기업의 투자 유치가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투자사는 당장의 수익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금을 베팅한다. 투자 결정이 수익으로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타트업이 투자자들의 매서운 평가를 통과했다는 사실은 성공을 향한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임을 인정할 수 있다.

토스, 마켓컬리, 야놀자는 대규모 투자금을 유치해 상장 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다. 현재까지 누적투자금 9630억원을 유치한 토스는 IPO 전 단계로 1조원의 투자금을 유치 중(2021년 12월 보도자료 기준)이다. 마켓컬리는 누적투자금 8928억원으로 유가증권시장 상장 예비심사를 받고 있다. 야놀자는 누적투자금 2조원으로 나스닥 상장을 준비 중이다. 글로벌 투자 시장이 악화된 현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의 행보가 장밋빛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현실은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험자본과 함께 더 큰 꿈을 향한 거침없는 항해를 이어가고 있는 스타트업의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지길 응원할 뿐이다.

 

등록 벤처기업 수가 증가했다

정부는 스타트업을 포함한 중소기업의 벤처기업 인증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벤처기업으로 인증받은 경우 법인세·소득세·취득세 등을 감면받을 수 있고, 신용보증 심사 우대와 특허 출원 시 우선 심사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공공기관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벤처기업 인증제도가 2021년 법 개정으로 민간 확인 제도로 개편된 후 벤처투자유형이 7.3%에서 10.5%로, 연구개발 유형이 7.3%에서 11.6%로 증가했다.

벤처기업 수의 증가는 벤처 생태계에 유입된 투자금의 증가와 연결되어 있다. 종래 스타트업 투자는 위험이 큰 만큼 모험기업을 지원하는 용도로 조성한 정부기관의 모태펀드와 전문성을 갖춘 민간 투자 기업에 한정되어 운영되어왔다. 하지만 비상장 기업 투자로 고수익을 얻는 사례들이 늘어나면서 개인의 스타트업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개인의 스타트업 엔젤투자는 3000만원까지 소득공제를 인정받는 세제 혜택도 누릴 수 있다. 고액 자산가들이 참여하는 신기술투자조합은 증권사 등 신기술사업금융회사(신기사)가 설립한 조합으로, 투자자(조합원)로부터 자금을 모아 비상장·벤처기업 등 성장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2021년 한 해 동안 벤처투자조합을 통해 유입된 투자금이 약 7.7조원, 신기술투자조합을 통해 유입된 금액이 약 8.2조원에 달했다.

기존 기업들도 스타트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기업들은 사내벤처기업(CVC·Corporate Venture Capital)을 설립해 스타트업 투자를 전문화하고 사내벤처 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기존 기업들의 스타트업 투자는 재무적 수익 외에 신성장 동력 확보와 혁신 문화의 확산이라는 부수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삼성전자의 사내벤처 육성 프로그램인 씨랩은 2012년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2015년 8월 사내벤처를 별개의 법인으로 독립시키는 스핀오프(spin-off) 제도를 도입한 이래 50개 이상의 기업이 분사했다. 최근 사내벤처 프로그램 ‘이노백(INNO 100)’을 도입한 CJ제일제당은 사내벤처팀을 1호 사내 독립기업(CIC·Company In Company)으로 분리했다.

사내벤처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창업한 기업의 물리적인 숫자가 많은 건 아니지만 사내벤처 지원제도는 기업 조직 전반에 혁신 문화를 확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더 큰 혁신의 자양분 역할을 한다.

 

스타트업 생태계 구성원이 다양해졌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제2벤처붐은 1990년대 후반 벤처붐과 2000년대 초반 벤처거품의 붕괴, 2010년 이후 모바일 시장의 팽창이라는 온탕과 냉탕을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제1벤처붐은 물론 제2벤처붐에서의 주연은 불가능의 허들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스타트업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 여정을 살펴보면 주연 못지않은 조연의 역할이 존재함을 확인하게 된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가 제1벤처붐을 맞이하던 시절에는 주연 배우도, 조연 배우도 그들이 맞이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허둥거려야 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 맞이하게 된 인터넷 세상은 그들 스스로 좌표를 찍기 어려울 정도로 낯설고 혼란스러운 신세계였다. 하지만 제2벤처붐을 맞은 스타트업 생태계 구성원들의 모습은 그 시절의 모습과는 달랐다. 제1벤처붐의 몰락을 거치며 혹독한 시간을 겪어낸 이들이 얻게 된 경험 자산이 제2벤처붐의 혼란을 정돈시켜주는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루나 사태를 통해 엿보았듯이 ‘돈’이라는 생물은 자칫 잘못 대하면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속성을 갖고 있다. 탐욕이 이글거리는 스타트업 생태계가 법 제도에 의한 규율 이전에 자율 기준을 세워 스스로를 규제하고 자정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년 동안 스타트업 생태계 구성원을 연결하고 열린 커뮤니티를 만들어온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노력이 더없이 귀중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2013년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고 한국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미래창조과학부와 네이버 등 인터넷 선도 기업, 투자기관, 창업보육기관 등이 힘을 합쳐 만든 비영리 민관협력네트워크이다. 그동안 스타트업들을 위한 정책 제안과 관련 자료의 발간, 각종 모임과 콘퍼런스, 교육을 통해 스타트업 생태계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때로는 엄부의 모습으로, 때로는 자모의 모습으로 스타트업 생태계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어두운 곳을 비춰온 노력이 오늘의 모습을 일궈낸 것이다.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