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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서 벤처·스타트업으로 ‘부자 패러다임’ 시프트 “뉴 리치 잡아라” WM 차별화 서비스 경쟁

차창희 기자
입력 : 
2022-04-05 10:21:42
수정 : 
2022-04-05 1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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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흔히 ‘부자’라고 하면 재산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금수저이거나 재벌 혹은 고연봉의 전문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돈을 굴리는 증권사들이 이들의 직업군, 특성에 맞춰 자산관리 전문 서비스를 펼쳐왔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증권가에선 이러한 전통적 부자인 ‘올드 리치(Old Rich)’ 대신 ‘뉴 리치(New Rich)’를 공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뉴 리치란 스타트업, 벤처 창업 및 자본 시장 투자를 통해 부자가 된 이들을 일컫는 업계 용어다. 국내 금융 경제 규모가 점차적으로 커지고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다양한 기업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부자가 된 이들이 업계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지난 코로나19 사태 충격 이후 주식, 암호화폐 등 투자의 중요성이 불거지면서 과감한 투자를 통해 부를 확장해온 이들 또한 증권 업계의 핵심 고객으로 성장한 모습이다.

그동안 증권사들은 올드 리치를 대상으로 주식, 채권, 부동산 등 전통적인 자산 관리 서비스를 중점적으로 제공해왔다. 하지만 뉴 리치를 대상으론 비상장 주식 투자, 스톡옵션(주식 매수 선택권) 행사, 기업공개(IPO), 전환사채(CB) 투자, 유·무상증자 참여 등 다양한 자본 시장 접근을 통한 자산 불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뉴 리치들만을 대상으로 한 비공개 투자 정보 공유 네트워크 형성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기능 강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더불어 스타트업, 벤처 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은 경영혁신·인사·홍보·회계세무 등 전문가들로부터 조직 관리 시스템 등을 코칭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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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러한 뉴 리치에 주목한 전문 서비스 조직 확충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연구 결과 벤처, 스타트업 창업자 등 뉴 리치가 보유한 자산 규모는 올드 리치 대비 2배 빠르게 성장해 오는 2030년엔 전체 부유층 자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것으로 나타났다. 골드만삭스·JP모건 등 세계적 투자은행(IB)들도 이미 뉴 리치 전담팀을 신설해 다양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IPO 전 우량 주식 발굴 특히 최근의 고액 자산가들은 IPO 전 우량 신입주를 발굴하기 위한 투자에 적극적이다. 삼성증권이 지난해 6월 기준 금융예탁자산 10억원 이상의 고액 자산가 64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비상장 주식이나 대체투자 펀드에 투자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이는 전체의 54.3%에 달했다. 특히 창업 3년 이내의 스타트업 기업 초기 투자에 관심도도 31%로 높았다. 기업 가치가 1조원 이상인 유니콘 기업 투자에 대한 관심도 21.6%로 높은 편이었다.

그동안 고액 자산가들은 주식, 채권 등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상품 투자를 선호해왔다. 하지만 최근 IPO 시장에의 수익률 훈풍이 이어지자 상장 전 저가에 미래 성장성이 기대되는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기 위한 공격적 투자로 태세를 전환하는 모습이다. 실제 고액 자산가 10명 중 6명은 비상장 주식에 관심이 높은 이유로 ‘높은 수익률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주식을 실제 보유하지 않고 진입 가격과 청산 가격의 차액만큼을 현금으로 결제하는 차액결제거래(CFD·Contract for Difference)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최대 2.5배까지 레버리지(지렛대) 투자가 가능하며 양도 차익 과세 및 대주주 과세 요건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뉴 리치의 수요가 높다. CFD 투자는 현행법상 전문투자자만 이용 가능한데 지난 2019년 3330명이었던 개인 전문투자자는 지난해 말 기준 2만4365명까지 늘었다. 이에 증권사들은 CFD 수수료를 낮추는 등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고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또한 뉴 리치들은 금리 인상 시기에 발맞춰 소위 은행 채권으로 불리는 신종자본증권(영구채) 투자에도 앞장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종자본증권은 흔히 조건부자본증권, 코코본드로도 불리며 주식과 채권의 성격을 모두 보유한 상품이다. 주식처럼 만기가 없거나 만기가 있더라도 매우 길지만 채권처럼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신종자본증권은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최근 금융회사들이 국제결제은행(BIS) 규제를 충족하기 위해 자본 확충 방법으로 발행을 늘리는 추세다. 최근 금융지주사들은 자본 확충을 위해 연 4%대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고액 자산가들의 수요가 몰리는 것이다. 시중 예금 금리보다 이율이 2배가량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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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은행 고금리 상품 드물어 신종자본증권의 인기가 높은 이유로 시중금리가 오르곤 있지만 막상 은행에 가면 금리 상승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품은 상당히 제한적이란 지적이 나온다. 은행의 예·적금의 경우 가입 금액에 제한이 걸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액 제한이 없는 경우엔 이율이 낮다. 또한 우대금리를 받기 위해선 추가적인 상품 가입이나 이벤트 참가 등 부가 조건이 뒤따른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고액 자산가들도 위험자산뿐만 아니라 안전자산을 포트폴리오에 넣고 싶어 하는데 금액, 이율 등에 다양한 제한이 걸리는 경우를 싫어한다”며 “비교적 여러 제한에서 자유로우면서 이율은 예·적금보다 높은 신종자본증권에 수요가 몰리는 추세”라고 밝혔다. 실제 신종자본증권 판매가 개시된 지 하루 만에 완판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자산 규모가 10억원 이상인 고액 자산가들이 올해 일부 증권사를 통해 신종자본증권을 매수한 규모는 1593억원으로 전체 거래 대금의 84%에 달한다. 자산 규모 1억원 미만 투자자 비중(75억원)의 21배를 훌쩍 넘는 수치다. 지역별 신종자본증권 매수 비중을 살펴보면 전통적 부촌으로 분류되는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비중이 36%로 가장 높았다. 또 신흥 부촌으로 평가받는 경기도 성남(판교) 비중도 22%에 달했다.

상대적 고이율임에도 리스크는 적은 편이다. 신종자본증권은 만약 금융당국이 부실 금융사로 지정하면 원금 상각이나 이자 미지급 조건이 발동할 수 있다. 하지만 발행사인 금융지주사에서 수십조원의 손실이 분기 단위로 발생해야 해 안정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특히 2030세대의 신종자본증권 매수세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올해 들어 단 두 달 만에 매수 규모가 전년 대비 5배 이상 증가했다. 20대는 45%, 30대는 560% 늘었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고이율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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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압구정동 서울옥션 건물 2층에 위치한 하나은행 아레테큐브 골드클럽 PB센터에서 한 고객이 미술품 매매와 관련한 상담을 받고 있다.
서학개미 열풍에 힘입어 미국 주식에 직접 투자하는 뉴 리치들도 늘고 있는 추세다. 특히 미국 주식을 한국 시간 기준으로 주간(오전 10시~오후 5시30분)에 거래할 수 있는 서비스가 등장하고 난 후론 일선 PB를 통해 미국 주식 주문을 넣는 고액 자산가들이 많다고 한다.

한 강남 지역의 PB는 “분석 결과 청년층보다 중장년층의 미국 주식 주간 거래 서비스 이용 비중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며 “평소 미국 주식 투자에 관심은 있었지만 시간적 제약 때문에 선뜻 시도하지 못했던 고액 자산가들의 접근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술과 금융을 결합한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높다. 최근 미술품 대체불가능토큰(NFT) 시장 확대에 따라 ‘아트테크(아트+재테크)’에 나서는 모습이다. 하나은행은 이러한 뉴 리치의 수요 대응을 위해 지난 2020년 금융사 최초로 서울옥션 강남센터 내 아레테큐브 골드클럽 PB센터를 오픈해 패밀리오피스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 전문기업인 서울옥션과 함께 미술품 시장에 주목하는 뉴 리치들을 대상으로 아트펀드, 미술품 담보 대출 및 자녀 세대 문화예술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이처럼 최근 증권사들이 뉴 리치를 대상으로 한 WM 서비스를 확대하는 건 급변하는 큰손들의 투자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뉴 리치를 대상으로 한 자산 관리 서비스에서 앞서가고 있는 건 오랜 기간 노하우를 축적해온 삼성증권이다.

삼성증권은 지난 2010년 업계 최초로 고액 자산가 전담 점포를 도입했다. 이후 고객과, 자산 규모는 각각 3300명, 100조원을 넘어서며 관련 시장을 주도해왔다.

최근 삼성증권은 업계 최초로 벤처, 스타트업 창업자 등 뉴 리치들을 대상으로 한 전담 조직인 The SNI 센터를 서울 강남파이낸스센터에 신설했다. 삼성증권은 향후 뉴 리치의 자산 증가 속도가 올드 리치를 뛰어넘고 시장에 미치는 영향 또한 월등히 높아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뉴 리치 전담조직 신설을 통해 고액 자산가 자산 관리 시스템 수준을 한 단계 높임과 동시에 벤처 투자 생태계 선순환을 앞장서 이끌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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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NI 센터는 신생 성장 기업들의 발전 단계에 따라 금융·비금융 서비스를 총망라해 맞춤형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The SNI 센터에는 11명의 전문 PB가 합류했다. 전담 서비스를 통해 뉴 리치들은 투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 형성과 더불어 다양한 자본 시장 참여를 통한 차별화된 전문 서비스를 제공받게 된다. 또한 55명의 본사 전문가로 구성된 ‘패밀리오피스’ 서비스도 누릴 수 있다. 패밀리오피스는 기관투자자급의 파트너 서비스를 개인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고객 자금을 모아 투자하는 ‘클럽딜’과 삼성증권 자기자본 투자에 참여하는 ‘공동투자’가 대표적이다. 구체적으로 지난해 인터넷은행인 케이뱅크 유상증자 및 반도체 설계 플랫폼 회사인 세미파이브의 신주, 구주 투자에 나서기도 했다. 국내 유니콘 기업들에 투자하는 펀드 상품도 인기라는 후문이다.

▶벤처·스타트업 겨냥 판교에 투자센터 삼성증권은 이번 조직 개편을 통해 벤처, 스타트업 육성의 초석이 되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실제로 벤처, 스타트업 창업자 등 신흥 부유층들은 후배 창업자 양성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한국 가요계 아이돌 그룹 열풍이 현재엔 월드 스타인 방탄소년단(BTS)의 탄생으로 이어졌듯 벤처 업계에서도 지속된 투자와 관심으로 글로벌 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혜진 삼성증권 SNI전략담당(상무)은 “최근 대학생들은 밤을 새서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투자자들이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며 “고액 자산가들의 뉴 머니가 이러한 초기 벤처, 스타트업에 도움도 주고 추후에 적절한 엑시트(투자금 회수)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신한금융투자의 경우 고액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한 특화된 자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청담·광화문금융센터를 올해 초 오픈하기도 했다. 두 센터는 최근 소비자금융 철수를 단행한 씨티은행의 소비자금융 자산 관리 전문가들을 신한금융투자가 영입해 오픈하게 됐다.

미래에셋증권도 국내 정보기술(IT) 업계의 핵심 요충지인 경기도 성남 판교테크원타워에 제2의 본사를 열고 뉴 리치 모시기에 나섰다. 이곳에 자산운용특화점포인 투자센터 판교를 출범시키고 본사의 연금 부문을 이전해 차별화된 자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NH투자증권은 창업자들을 위한 컨설팅을 전담할 조직을 마련하기도 했다. 프리미어블루 본부의 산하에 패밀리오피스지원부를 신설해 5년 이내 설립된 법인들에 대한 컨설팅을 전담하는 식이다. KB증권도 올해 중순께 패밀리 오피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인 압구정 플래그십 PB센터를 개설할 예정이다.

[차창희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9호 (2022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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