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애그리게이터’산업에 뭉칫돈이 몰리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신생 업종임에도 벤처캐피털들이 투자 1순위로 찍어 경쟁적으로 자금을 태우는 양상이다.

28일 스타트업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설립된 애그리게이터 업체인 홀썸브랜드는 최근 진행한 시리즈A 라운드로 6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시리즈A는 기업 설립 후 정식 사업 착수를 위해 받는 첫 투자다. 앞서 창업 단계에서 받은 시드투자 자금 65억원까지 합하면 설립 10개월 만에 665억원을 모은 것이다. 신생 업종의 신생 기업이 유치한 투자로는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액수라는 게 스타트업업계의 평가다. 스타트업 투자 정보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해 스타트업 전 업종의 시드~시리즈A 평균 투자 유치금액은 18억3997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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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애그리게이터 기업에도 평균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자금이 몰렸다. 부스터스는 지난 1월 시리즈A로 120억원을 유치했다. 넥스트챕터, 뉴베슬도 각각 지난해 8월과 지난달 50억~100억원 수준의 시리즈A 투자 유치를 마쳤다.

애그리게이터가 뭐길래

애그리게이터는 네이버, 쿠팡 등 전자상거래(e커머스) 플랫폼에 입점한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을 인수해 육성하는 역할을 한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분야의 유망 소상공인을 발굴한 뒤 정보기술(IT) 솔루션을 덧붙여 각 플랫폼에 맞게 최적화된 상품 전략을 짠다. 일종의 ‘소상공인 연합체’인 셈이다.

홀썸브랜드는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총 5개 업체를 인수했다. 어린이 눈건강 의약품, 반려동물 영양보충제, 탈취제, 숙취해소 음료 등을 제조하는 업체다. 이들 업체에 적합한 플랫폼이 어딘지를 따져보고,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떤 상품을 어떤 시간에 판매하는 게 유리한지 등을 파악한 뒤 그에 맞춰 마케팅을 펼치는 식이다.

스멜탄의 성공이 대표적 사례다. 홀썸브랜드는 지난해 말 탈취제 브랜드 스멜탄을 인수해 주요 소비자 층을 분석한 뒤 기존에 입점해 있던 네이버, 쿠팡보다 생활용품 e커머스 플랫폼인 ‘오늘의집’을 택해 집중 공략했다. 이런 전략을 토대로 스멜탄은 2개월 만에 매출이 120% 증가했다.

애그리게이터는 투자 받은 자금을 기업 인수용으로 주로 쓴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려면 많은 업체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홀썸브랜드는 이번에 투자 유치한 금액으로 연내 20개 업체 인수를 목표로 업체들과 협상하고 있다. 부스터스도 업체 10여 곳과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베슬은 지난달 투자 유치한 자금으로 8곳과 인수 실무 협상을 하고 있다.

“한국 시장, 가능성 크다”

애그리게이터 시장은 미국과 유럽에서 최근 1~2년간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애그리게이터는 스라시오다. 2018년 6월 설립된 스라시오는 34억달러(약 4조1300억원)를 유치했다. 이 자금으로 200개 이상의 업체를 인수해 지난해 10억달러(약 1조2100억원) 매출을 달성했다. 이외에 베를린브랜즈그룹(BBG), 파운드리, GOJA, 퍼치 등 유니콘 기업급 애그리게이터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80여 개 애그리게이터가 설립됐으며 대부분 세계 최대 e커머스 플랫폼인 아마존을 대상으로 사업을 펼친다.

국내에서도 e커머스 시장이 코로나19 이후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애그리게이터 사업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e커머스 시장 규모는 지난해 920억달러(약 111조원)로 글로벌 6위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애그리게이터는 e커머스 시장 규모에 비해 미약하다”며 “향후 1~2년간 시장 선점을 위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독점 플랫폼 없는 건 한계”

하지만 아마존이 독점적 플랫폼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유럽과는 다르게 네이버, 쿠팡, 11번가 등 다양한 플랫폼이 점유율을 나눠 갖고 있는 국내 e커머스 구조는 애그리게이터가 성장하는 데는 한계 요인으로 지적된다. 애그리게이터의 핵심 기능이 ‘플랫폼 최적화’이기 때문에, 다루는 플랫폼이 많으면 선택과 집중이 쉽지 않고 데이터와 노하우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국내 e커머스 시장 점유율(2020년 기준)은 네이버가 17%, 쿠팡 13%, 이베이 12%, 11번가 6% 등이다.

e커머스업계 관계자는 “네이버, 쿠팡 등 다양한 플랫폼이 있다 보니 애그리게이터 중 누가 가장 빨리, 가장 많은 수의 플랫폼 네트워크와 데이터를 확보하냐가 중요하다”며 “당분간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구민기 기자 k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