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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 튼 대기업 지주사 벤처 투자…손발 꽁꽁 묶어놓고 한국판 비전펀드?

  • 배준희 기자
  • 입력 : 2021.11.19 15:59:10
  • 최종수정 : 2021.11.24 21:54:11
올 연말부터 대기업집단의 일반 지주사가 벤처 투자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지금까지 대기업은 직접 벤처캐피털사를 설립할 수 없었지만 지난해 말 일반 지주사의 CVC(Corporate Venture Capital) 보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지주사는 CVC를 완전 자회사로 두고 스타트업 투자를 통한 외적 혁신을 도모할 수 있게 됐지만, 출자 제한 등 까다로운 요건 탓에 시너지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CVC, 대기업-벤처 혁신 마중물

▷전략적 투자로 지식·기술 확산

CVC는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전략적 혹은 재무적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털을 말한다. 기존 벤처캐피털은 재무적 투자자로 역할이 국한됐으나 CVC는 결이 다르다. 대부분 스타트업은 신기술이나 신제품을 개발했더라도 이를 브랜딩하고 유통해 매출을 창출하는 역량이 부족하다. CVC는 대기업집단에 속해 있으므로 CVC로부터 투자받은 스타트업은 이들의 막강한 유통 채널을 비롯한 전략적 자원을 손쉽게 지원받을 수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해외에서는 빅테크를 중심으로 CVC를 통한 벤처 투자가 활성화된 지 오래다.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CVC 투자 규모는 해마다 늘고 있다. CVC 투자는 2014년 179억달러(약 21조원)에서 매년 증가하더니 지난해 731억달러(약 85조원)를 기록했다. 미국은 전체 벤처캐피털 시장에서 CVC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CVC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한 빅테크는 구글이다. 구글은 구글벤처스·캐피털G·그래디언트벤처스 등 3개의 CVC 조직을 두고 혁신 스타트업에 동시다발적으로 투자를 벌이고 있다. 가령, 2009년 설립된 구글벤처스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연평균 76건, 누적 184억달러를 벤처 마중물로 쏟아부었다.

대기업 등 기존 기업이 CVC 설립에 적극적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CVC는 벤처캐피털이지만 재무적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기술과 혁신 기반 스타트업에 지분 투자를 함으로써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크다. 특히 하이테크 산업은 기존 기술이 신기술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기술의 전환 속도가 무척 빠르고 불연속적 기술 개발이 전개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문제는 개별 계열사 차원에서 불확실성 대응 전략을 오롯이 짜기가 녹록지 않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대기업 지주사 주도로 설립된 CVC는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거나 결이 다른 신사업을 모색하고 관련 기업에 지분 투자를 단행함으로써 그룹이 노출된 경영 불확실성을 헤지하는 역할에 주력한다. 가령, CVC가 기술 기반 스타트업에 소규모 지분 투자를 단행한 뒤 기술, 제품 개발 과정을 지켜보다 전략적 확신을 갖고 추가적인 지분 투자 혹은 인수합병(M&A)으로 성장 기반을 확충하는 식이다.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풍부한 전략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어 성장 과정에 수반되는 불확실성을 상당 부분 낮출 수 있다. 스타트업 창업자 역시 굳이 기업공개(IPO)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분 매각으로 엑시트(exit)한 뒤 또 다른 창업을 노릴 수 있다.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CVC 도입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금산분리, 재벌 특혜 등 정치적 논란에 휘말려 제대로 된 논의조차 못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CVC 관련 전향적인 규제 완화를 시사하면서 겨우 물꼬를 텄다. 국내 대기업 지주회사에 CVC 설립을 허용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2010년대 중반부터 국회를 표류하다 지난해 12월 가까스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반쪽짜리’ CVC 우려 커

▷펀드 확장성 가로막아

그럼에도 한쪽에서는 ‘반쪽짜리’ CVC라는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CVC 운영의 자율성이 제약됐다는 점이 입길에 올랐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따르면 대기업 지주회사는 지분 100%의 완전 자회사 형태로만 CVC를 설립할 수 있다. 외부 자금 차입 역시 자기자본의 200%로 제한된다. 펀드 조성 시 총수 일가와 금융 계열사의 출자는 불가능하고 해외 투자는 CVC 총자산의 20%로 묶었다. 계열사와 대기업집단 투자 역시 불가능하다. 공정위가 CVC에 이런 의무를 부과한 것은 CVC가 대기업 총수 일가의 사금고로 변질되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다.

이런 규제가 CVC의 확장성을 옭아맨다는 점에서 과잉 입법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재계와 벤처업계에서 공통적으로 꼽은 독소 조항은 CVC를 지주사의 완전 자회사로 두도록 한 점, CVC의 부채비율을 200%로 제한한 점, 펀드 조성 시 외부 자금을 40%로 제한한 점 등이다.

가령, 부채비율 200%는 기존 창업투자회사(2000%)나 신기술금융회사(900%)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다. CVC펀드의 외부 자금 비중을 40%로 제한한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낮은 부채비율과 외부 출자 비중 제한은 CVC펀드의 확장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 등 글로벌 메가펀드와 사활을 건 투자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A벤처캐피털 대표는 “펀드 사이즈가 작으면 연기금 등 주요 LP의 요구 수익률을 맞추려 투자 대상을 고를 때 일정 수준 시리즈 라운딩을 거친 될성부른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선별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관료화된 조직문화를 갖춘 CVC 입장에서는 모험적인 투자 대상을 찾는 것을 망설이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대기업 지주사 관계자는 “정부가 CVC를 완전 자회사로 설립하게 한 것은 구글벤처스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아는데 미국에는 완전 자회사가 아닌 CVC 역시 수두룩하다. 개별 경영 환경과 전략적 지향점에 따라 탄력적으로 CVC를 설립해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 입법 취지를 가장 잘 구현하는 길”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해외 투자 제한을 두고도 뒷말이 따랐다. CVC가 복수의 기업에 지분 투자를 한다는 점에 비춰 ‘총자산의 20%’ 정도로는 투자 대상 기업의 전략적 투자자로서 유의미한 영향력을 확보하기가 녹록지 않다. 기술 기반 기업은 대규모 자금 유치로 기존 주주의 지분이 희석되는 속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펀드 규모 확장을 가로막은 상태에서 해외 투자에도 허들을 두다 보니 해외 신기술 스타트업과 개방형 혁신이나 지식 확산(knowledge spillover) 등의 시너지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또 다른 지주사 관계자는 “부채비율과 외부 출자 제한 등을 보노라면 대기업의 현금성 자산으로 단순 재무적 투자자로 머물러달라는 것이 정부의 속내인지 여러모로 의아할 뿐”이라고 털어놨다. 강형구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는 “해외 투자를 20% 이하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대로는 해외 혁신 기술에 대한 지식 파급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며 “벤처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서는 규제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5호 (2021.11.24~2021.11.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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