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 개선한 창조경제혁신센터…전국에 창업DNA 심는다

지난해 9월 11일 서울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찾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스타트업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중소벤처기업부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지역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아는가. 잘 되고 있는 부분은 계속 유지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 첫 국무총리를 지낸 이낙연 의원이 2017년 총리 후보자 시절 한 이 발언은 창조경제혁신센터(혁신센터)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의원이 전남지사로 일할 당시 혁신센터가 지역 창업생태계에서 보여주는 존재감과 의미를 경험했다. 단순히 전 정권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버려둘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지난 정권에서 내세웠던 '창조경제'가 붙은 조직, 기관, 편제가 현 정부 들어 대부분 사라졌지만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살아남았다. 혁신센터는 지역사회 혁신창업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한 덕에 존폐론을 넘어서 나날이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혁신창업은 지역에서"

지난해 4월 충북 혁신센터 창업기업 직원들이 중국 포럼 참석 전 사전교육을 받고 있다. /사진=창조경제혁신센터

창조경제혁신센터가 다른 창업보육기관과 다른 점은 △민간의 자율적 운영 △삼성, SK 등 대기업 매칭 △전국 모든 지역의 창업 허브화를 들 수 있다. 19개 센터 중 17곳은 정부 예산을 지원 받지만 대부분의 운영은 센터 스스로 맡는다.

각 지역 센터에 매칭된 대기업은 멘토로서 자신의 노하우와 자원을 스타트업과 창업가들과 나눈다. 경기센터의 스타트업들은 KT가 제공하는 5G망을 테스트베드 삼아 관련 서비스를 개발한다. 전남센터 창업기업들은 GS의 유통망을 뒷배 삼아 농수산식품·관광 판로를 개척하는 데 들이는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스타트업들은 기술개발에 필요한 장비들도 혁신센터에서 공유한다. 경북센터 창업기업은 신청만 하면 3D설계장비·프린터와 디지털 현미경 등을 사용할 수 있다. 전남센터에는 대용량 동결건조기, 열풍건조기 등 식품 스타트업들을 위한 장비가 구비됐다.


이 같은 혁신센터의 역할은 지역의 혁신 인재들이 굳이 창업을 하기 위해 연고도 없는 수도권으로 몰릴 수고를 덜어준다. 혁신센터가 지역 혁신창업의 허브로서 창업가들을 돕고 그 성과를 다시 지역에 환원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
혁신센터 기능 개편 '돈'까지 끌어온다

디지털 재활 솔루션 기업 네오팩트가 개발한 라파엘 스마트 글러브. 네오팩트는 경기 창조경제혁신센터를 거쳐 2018년 11월 코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사진=네오팩트

대기업-혁신센터의 1대1 매칭구조는 2018년 2월부터 외연을 넓혔다. 지역의 중소·중견기업과 대학 등에도 문을 열어 각 지역의 기업-창업가 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협력 파트너가 대폭 늘었다. GS가 전담하던 전남 혁신센터에 전남농업기술원, 지역 대학 등이 함께 참여하는 식이다.

2017년까지는 창조경제펀드와 연계한 간접투자기능만 혁신센터에 있었다. 2018년부터는 액셀러레이터 등록·개인투자조합 결성 등을 통한 직접투자 기능을 확충했다. 그 결과 2017년 이전까지 1개 센터에 불과했던 엔젤투자자 등록이 17개 센터로 확대됐다. 시드 투자금을 확보한 센터도 1개에서 10개로 늘고, 2017년까지 전무했던 개인투자조합은 14개 센터에 자리잡았다.

아울러 혁신센터가 지역 여건과 참여기업의 수요를 반영해 특화분야를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의 정부·대기업 주도의 혁신센터 운영이 '민간자율형'으로, 또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수평적 관계로 완전히 체질을 개선한 셈이다.

충북센터의 한 창업기업 관계자는 "수도권 창업보육센터들이 비싼 임대료 등에 힘겨워하는 스타트업에 공간 위주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충북센터는 공간 외에 창업 프로그램과 LG라는 대기업의 네트워크 및 리소스를 준다"며 "벤처캐피탈을 대상으로 한 IR 기회까지 충북에서 주어지는 상황에서 굳이 서울에 가서 창업할 이유가 없다"고 전했다.
싸이월드 창업자·C-랩 설계자도 혁신센터에 힘 보탠다

(왼쪽부터)전정환 제주 혁신센터장, 이재일 대구 혁신센터장, 이동형 경남 혁신센터장. /사진=뉴스1, 창조경제혁신센터

정부는 올해만 벌써 10개 센터가 센터장을 신규 선임했다. 혁신센터를 책임지는 중소벤처기업부의 박영선 장관이 센터장 면접마다 참석해 후보자를 검증하는 등 혁신센터 살림살이를 직접 챙겼다. 박 장관은 형식적 면접에 그치지 않고 깐깐한 질문을 던져 후보자들을 긴장시킨다. 한 지역 센터의 경우 5번째 면접만에 겨우 신규 센터장을 영입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신규 센터장 중에는 센터별로 매칭된 대기업 출신도 있지만, 벤처판에서 이름을 날리던 스타급 창업가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지역 창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혁신센터에 몸을 담았다. 싸이월드·멜론 창업자인 이동형씨는 지난 6월부터 경남센터를 맡아 소프트웨어 중심 제조업·시장중심 스타트업 팩토리를 키우고 있다.

삼성전자 사내벤처의 산실인 C-Lab(C-랩)과 스핀오프를 설계한 이재일 전 삼성전자 창의개발센터장은 대구센터를 맡아 ICT·바이오·헬스분야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데 나섰다. 다음카카오의 사내벤처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제주 신사옥 설계를 맡았던 전정환 컨텐츠랩 창업자는 제주센터장으로 로컬크리에이터를 기르면서 상생플랫폼을 구축하고, 직접·후속투자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색깔 논쟁' 떠나 창업생태계 실리 챙긴 문재인 정부

지난해 6월 19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국회수소경제포럼 주최, 머니투데이·국가기술표준원·수소융합얼라이언스추진단 공동 주관으로 열린 '2019 대한민국 수소엑스포'에서 관람객들이 광주창조경제혁신센터 부스를 살펴보고 있다.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박근혜 정부 당시 만들어진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촛불정국으로부터 힘을 받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존폐 기로에 놓이기도 했다. 지난 정부에서 정부부처의 각 행정담당과를 '창조행정과'로, 과학기술 주무부처를 '미래창조과학부'로 명명하는 등 '창조'라는 단어를 본래의 뜻과 무관하게 남용한 탓에 창조경제혁신센터 역시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몰릴 뻔했다.

이에 처음 제동을 건 것은 문재인 대통령으로 알려졌다. "지난 정부의 것이라도 좋은 것은 살리는 좋은 선례를 만들겠다"며 혁신센터를 거론했다는 것. 홍종학 초대 중기부 장관 역시 명칭만이라도 바꾸자는 부처 안팎의 제안에 대해 "일 잘하는데 굳이 이름을 바꿔 혼란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창조경제'라는 단어 자체를 박근혜 정부의 창작물로 치부하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종호 강원 혁신센터장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영국 블레어 정부 당시 토지·노동·자본이라는 기존의 생산 3요소에 '창조기술'(Creatice Technology)을 결합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는 2004년 UN이 개발도상국의 개발전략으로 공식 채택했고, 한국에서 이 영향을 받은 첫 작품은 노무현 정부의 '혁신도시'였다는 설명이다.

중기부 관계자는 "과거의 열악했던 지역 창업생태계가 19개 혁신센터로부터 다양한 투자·판로 지원을 받는 등 활성화되고 있다"며 "혁신센터는 최근 신산업 및 소재·부품·장비기술 지원을 늘리는 등 지역의 혁신창업 허브로서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