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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서열 바꾼 당대 창업 기업

  • 박수호·반진욱·박지영 기자
  • 입력 : 2020.07.10 13:08:34
  • 최종수정 : 2020.07.13 11:29:41
재벌.

영어 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로 유명한 단어가 됐다. 한국 특유의 오너 기업인 집안이 대를 이어 경제 부문 영향력을 키우면서 생긴 말이다. `부의 대물림`으로 경제 활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는 매번 제기된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은 오히려 당대 창업한 이들이 억만장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3년 연속 세계 최고 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회장,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도 미묘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매년 발표하는 공정위 대기업 집단 순위를 보면 창업자가 직접 일군 후발주자 기업이 상당수 재계서열에서 약진하고 있다. 매경이코노미는 창간 41주년을 맞아 재계 서열 흔드는 당대 창업기업을 조망해봤다.



카카오·하림 재계 30위 이내 포진

네이버·넥슨·셀트리온 서열 ‘껑충’


한국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다음 억만장자는 누굴까.

김정주 NXC(넥슨 지주회사) 대표가 포브스가 선정한 한국 갑부 순위에서 2위를 기록했다. 김 대표 자산은 총 90억달러에 달한다.

그 뒤로 김범수 카카오 의장(6조4200억원, 5위), 권혁빈 스마일게이트홀딩스 의장(3조7000억원, 9위),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2조8400억원, 11위), 방준혁 넷마블 의장(1조9800억원, 15위),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1조9800억원, 16위) 등이 상위권에 포진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창업해서 지금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개인 자산만 놓고 보면 재계 서열에 이미 큰 변화 조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정화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전 중소기업청장)는 “IT, 모바일 시장 격변기에 한국 기업가들이 약진한 것은 의미 있다”며 “특히 특유의 창의성, 빠른 의사결정, 법정관리 기업을 M&A해 회생시키는 경영 능력, 해외 트렌드를 적극 현지화한 점 등 종전 재벌 그룹의 빈틈을 잘 공략해 당대 창업 기업이 재계 상위권으로 도약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재계 서열 어떻게 바뀌었나

▷대우 사라진 자리 카카오·하림 채워

세계적 경제학자 짐 콜린스는 2002년 ‘좋은 기업을 넘어…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을 써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8년이 지난 후 그는 다시 책을 썼다. 2002년 발간 당시 위대한 기업이라 지칭했던 기업 중 상당수가 사라지거나 사세가 위축된 때문이다. 2010년 발간한 그의 책은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였다. 책에서 그는 당시에는 위대해 보였지만 결국 지속 가능 성장을 추구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은 시간이 지나면 진가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정리했다.

한국의 재계 서열을 보면 그의 논리는 그대로 들어맞는다. 각 시대별로 특정 산업이 각광받으면서 재계 서열이 급상승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급격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라진 회사도 부지기수다.

1980년대는 제조업과 건설업이 쌍두마차로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 이른바 ‘중후장대’ 산업이 강세를 보였다. 자동차·건설·조선업이 주력인 현대가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쭉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자동차와 건설업이 주력인 대우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건설·자동차·조선 사업이 주축인 쌍용도 꾸준히 10위 안에 들어갔다.

해외 건설 전문그룹도 선전했다. 동아건설은 1987년 재계 서열 12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0년대 초반은 반도체의 시대였다. 현대가 쭉 1위를 지킨 가운데 1992년부터 삼성이 대우를 누르고 2위로 올라섰다. 1992년은 삼성이 세계 최초로 64메가 디램 개발에 성공하며 반도체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해다. 럭키금성에서 이름을 바꾼 LG도 LG반도체를 앞세워 대우를 눌렀다.

1990년대 후반은 큰 변화가 재계를 덮쳤다. 바로 한국 경제를 강타한 ‘IMF 외환위기’다. 재계 3~4위권을 오가며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대우는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2000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한때 ‘조선’ 신화를 쓰며 재계 서열 13위까지 올랐던 STX그룹은 갑작스레 닥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한때 ‘조선’ 신화를 쓰며 재계 서열 13위까지 올랐던 STX그룹은 갑작스레 닥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2000년대부터는

▷IT·조선·소비재 강세 뚜렷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또 한 번 큰 변화가 일었다. 인터넷 발달로 IT붐이 이는 가운데 반도체·조선·소비재 역시 빛을 봤다. 반도체 강자 ‘삼성전자’를 보유한 삼성이 ‘왕자의 난’을 겪으며 분해된 현대그룹을 누르고 본격적으로 1위에 등극한 시점도 이즈음이다.

2004년 경영 정상화에 성공한 하이닉스도 재계 20위권에 들어왔다.

유통·소비재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2005년 유통공룡 롯데가 한진·KT를 제치고 5위로 올라섰다.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신세계그룹(2008년 22위), 제일제당(현 CJ, 2008년 23위)은 주요 그룹 순위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현대백화점 역시 유통 3사 입지를 굳히며 소비재 산업을 이끌었다. 조선업의 성과도 눈부셨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해 STX조선, 대우조선해양, 한진중공업이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특히 STX는 한때 13위까지 오르며 조선 강자의 힘을 과시했다.

2010년대부터 금융과 IT 산업이 본격적으로 도약을 시작했다. 동원그룹에서 분리해 나온 한국투자금융과 보험 강자 교보생명보험이 순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인터넷 증권사 ‘키움증권’으로 유명한 다우키움도 2019년 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스마트폰·PC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카카오와 네이버 등 IT 강자들이 20~30위 순위권에 진입했다. 특히 카카오는 지난해 32위에서 올해 23위로 9계단이나 껑충 뛰어올랐다. 넥슨과 넷마블도 재계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게임산업의 힘을 증명했다.

건설부문 창업 1세대 기업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부영·중흥건설, SM그룹 등 신흥 건설기업 순위 상승세가 2010년 말부터 뚜렷했다. 부영은 2010년 30위를 기록하며 대기업집단에 처음 등장해 2020년에는 17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SM그룹의 성장세도 눈길을 끈다. 2017년 서열 46위로 대기업집단에 지정됐다. M&A 강자로 알짜 매물을 사들이며 자산 총액을 꾸준히 키웠다. 2020년 기준 재계 서열은 38위다.

더불어 최근에는 기존 재계에서 이름을 찾기 힘들었던 바이오 기업과 사모펀드가 본격 등장하고 있다. 바이오 강자인 셀트리온은 2016년 재계 서열 60위에 오르며 본격 대기업집단에 합류했다. IMM인베스트먼트도 2020년 재계 순위 56위를 기록해 사모펀드 최초로 대기업집단으로 분류됐다.



▶비운의 기업도 다수

▷한때 13위 STX ‘승자의 저주’로 해체

재계 서열은 대내외 충격이 컸을 때 급격하게 바뀌고는 했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전후 높은 부채비율, 문어발 경영을 했던 기업이 하나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주인이 바뀌는 등 험로를 걸어야 했다. 대우그룹 해체가 상징적이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 극동건설, 우성건설, 거평, 벽산, 한라, 동아건설 등이 몰락하거나 순위가 급격히 떨어졌다.

2000년대 이후에도 나락으로 떨어진 ‘비운의 기업’은 적잖다.

2001년 전 재산 20억원을 털어 워크아웃 위기에 빠진 쌍용중공업을 인수한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스토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그룹을 재계 13위까지 올려놨으나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이후)에 M&A를 통한 확장 전략에 제동이 걸리며 그룹 자체가 해체됐다.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대 창업 기업으로 동부그룹(현 DB), 웅진그룹도 비슷한 사례다.

김준기 전 동부그룹 회장이 대학 시절 1969년 미륭건설, 1971년 동부고속을 잇따라 창업하면서 출범한 동부그룹은 건설업으로 서남아시아, 중동 등지에서 큰돈을 벌면서 창업 10년 만에 30대 그룹에 진입, 한때 재계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에 무리한 투자를 했고 그룹 모태인 동부건설도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고초를 겪다 사명을 DB로 바꾸고 최근 아들이 물려받았으나 재계 서열은 한참 뒤로 밀렸다.

웅진그룹 역시 ‘샐러리맨 신화’로 불리는 윤석금 회장이 창업, 교육, 출판 사업에서 식품, 렌털 사업으로 확장하며 한때 재계 서열 32위에 오를 정도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건설, 저축은행 등 무리한 사업 확장 끝에 유동성 위기를 맞아 사세가 위축됐다.

[박수호·노승욱·나건웅·반진욱·박지영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66호 (2020.07.08~07.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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