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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매경포럼] 일본엔 없는 벤처 인프라가 희망이다

김명수 기자
입력 : 
2019-08-08 00:07:01
수정 : 
2019-08-08 17: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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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극일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소재·부품산업 육성을 거론하지만 우리 당국이 주목해야 할 핵심 대상은 바로 벤처기업이다. 우리에겐 있지만 일본에 없는 게 바로 벤처 생태계란 점에서다. 벤처 생태계 덕분에 우리는 미래 산업 부문에서 신생기업들이 나오고 있고 일본이 개척하지 못하는 사업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극단적 예를 들면 대부분 일본인들은 일본 내 최대 모바일 메신저인 '라인'의 모기업 국적을 일본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라인의 본류는 네이버다. 네이버는 20년 전 창업해 2002년 코스닥시장 상장을 통해 국내에서 힘을 키운 뒤 일본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장악했다. 이어 태국 등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휩쓸고 있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에는 벤처기업들이 신생 시장에서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벤처 생태계란 토양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한국이 전 세계 온라인 모바일 게임시장을 장악한 것도 바로 벤처 생태계 덕분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인 것도 국내 부품·장비 공급업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수소차 자율주행 공유경제 인공지능 블록체인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새로운 산업에서 신제품과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할 첨병도 벤처기업이다.

벤처기업들이 맘껏 창업할 수 있도록 돕는 벤처캐피털이나 코스닥시장이 주요한 벤처 인프라다. 민간의 투자 위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정부 공적자금도 벤처기업의 든든한 젖줄이다. 기술도 담보로 인정해 주는 제도나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도록 돕는 스톡옵션제도도 대표적인 벤처 인프라다. 세계의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부러워하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구축된 생태계 안에서 지금까지 배출된 벤처기업 수는 7만개에 달한다. 중소벤처기업부와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전체 벤처기업 수는 3만5000여 개이고 매출 1000억원이 넘는 벤처기업은 572개, 1조원 돌파 기업은 11개사에 달한다. 이들의 전체 매출액은 약 225조원으로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 매출액(239조원)에 이어 두 번째 수준이다. 이들이 창출한 고용 인력은 약 76만명으로 국내 5대 그룹 종사자 총합을 웃돈다.

이 성과는 벤처기업 생태계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한국 벤처 생태계를 구축한 공로자를 꼽으라면 고(故) 이민화 초대 벤처기업협회장이 단연 우선적으로 뽑힌다. 이 회장은 1995년 벤처기업협회를 설립한 이후 얼마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벤처기업 관련 생태계 조성과 규제 철폐를 외쳤던 분이었다. 그만큼 벤처 생태계 조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7만개란 벤처기업 배출을 이 회장이 이뤄내지는 않았으나 그가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정도다.

우리가 일본 경제를 따라잡기 위한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이 회장은 벤처 생태계를 구축하면서 틈 날 때마다 "일본은 한국에 앞서 개방한 데 이어 산업혁명 후발주자로서 부상하면서 한국과 기술 격차를 벌렸고 그 결과 우리는 한일합방이란 굴욕을 당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에 굴하지 않고 벤처기업들이 힘을 키운다면 일본을 비롯한 앞선 외국 기업 기술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벤처 생태계를 단지 국내 기업들의 생존전략 차원이 아니라 한국의 생존전략까지 염두에 둔 주장이었다.

그 결과 요즘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신생기업을 뜻하는 유니콘 기업에서도 한국 벤처기업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미국 조사기관인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쿠팡 야놀자 토스 등 모두 9개 유니콘 기업이 등재돼 세계 유니콘 기업 순위에서 독일과 같은 5위다. 1위는 미국, 2위는 중국, 3위는 영국, 4위는 인도이다. 지난해 6월까지 3개였던 유니콘 기업은 불과 1년 만에 3배인 9개사로 대폭 증가했다. 유니콘 기업 급증은 벤처 투자와 함께 신생기업 창업이 늘면서 벤처 생태계가 성숙된 영향이 크다. 반면 일본 유니콘 기업은 3개에 불과하다. 그만큼 혁신 성장 가능성은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 있는 셈이다. 적어도 벤처 생태계는 한국이 일본보다 강한 국가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앞선 기술을 무기로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최근 벤처투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벤처 생태계에서 초격차 전략을 활용하고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규제라는 걸림돌을 더 빨리 걷어낸다면 극일의 길은 머지않다고 본다.

[김명수 부국장 겸 지식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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