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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투자에 열 올리는 대형 금융사-文 “혁신금융” 강조하자 너도나도 벤처투자

  • 박수호 기자
  • 입력 : 2019.05.07 09:16:53
  • 최종수정 : 2019.05.07 14:41:12
# 연립·다세대주택은 부동산 시장에서 그렇게 각광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시세를 자세히 알기 어렵고 손바뀜도 많지 않아서다. 그나마 재개발 지역 혹은 예정 지역 정도면 내재가치를 따져 거래가 되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부르는 게 값’이란 인식이 많다.

이런 비정형 부동산 시세를 부동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소비자에게 실시간 제공하는 스타트업이 ‘빅밸류’다. 초기 벤처회사지만 벌써 신한은행과 손잡고 연립·다세대 부동산 정보서비스를 만들어 신한은행 고객이 이용할 수 있게 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김진경 빅밸류 대표는 “신한금융지주 산하 신한퓨처스랩에 지원해 각종 지원을 받으며 사업 모델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지난해 20억원 규모 시리즈A 투자에 나설 때 공동투자자로 참여하며 전략적 투자자이자 파트너로서도 큰 힘이 돼줬다”고 말했다.

벤처투자는 흔히 벤처캐피털이나 사모펀드 등 투자 전문회사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은행권에서는 KDB산업은행, IBK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이 그나마 정책 차원에서 벤처투자에 나서는 정도였다. 최근에는 ‘신한금융그룹·빅밸류’ 사례에서 보듯 분위기가 완전 바뀌었다. 대형 시중은행이 직접 자기자본투자(PI)를 하는가 하면 펀드를 조성해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김진경, 김홍래 빅밸류 공동대표

김진경, 김홍래 빅밸류 공동대표

신한금융그룹은 최근 조용병 회장,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혁신성장 재원 마련, 스타트업 투자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신한금융그룹은 최근 조용병 회장,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혁신성장 재원 마련, 스타트업 투자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대형 금융사가 왜 벤처투자를?

▷예대마진, 은행 위주 순익구조 바꿀 때

대형 금융그룹이 위험천만하다고 알려진 벤처투자에 직접 나서는 것일까.

일단 예대마진 기반 수익구조가 언제까지 받쳐줄지 알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 지성규 KEB하나은행장은 “예전 사업 방식으로는 다가오는 미래 대비에 충분치 않다. 다양한 자산운용·투자 기회를 적극 발굴해야 한다. 최대 186개국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스타트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지원하다 보면 은행의 비이자이익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의지도 작용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금융정책 기조가 ‘혁신금융’이다. 스타트업 활성화를 통해 대기업 위주 산업구조를 재편하면서 청년실업도 해소할 수 있기에 금융권의 태도 변화를 독려하는 분위기다.

문 대통령은 “은행 여신 시스템을 전면 혁신할 것”이라며 “부동산 담보와 과거 실적이 아닌, 아이디어와 기술력 같은 기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평가해야 한다. 과거 전통 제조업 기준으로 마련된 심사기준 때문에 거래소 상장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혁신기업이 코스닥 시장에 대거 진입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될 것”이라 강조했다.

최근 대통령의 혁신금융 선포식 참석 이후 금융권은 이런 정부 의지에 적극 화답하는 모양새다. 신한금융그룹이 조용병 회장 주재하에 ‘신한퓨처스랩 제2 출범식’ 자리에서 투자 유망 기업 명단 6000곳 조성, 2조1000억원 규모로 혁신성장 재원 마련은 물론 앞으로 5년간 핀테크 기업에 25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천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에 질세라 KEB하나은행도 신한 발표 이후 얼마 안 돼 ‘1Q 애자일 랩(Agile Lab)’ 8기 출범식 자리에서 지성규 행장이 직접 올해 5000억원 수준의 직간접투자를 유치해 유망 스타트업과 지역 거점대학과의 산학 연계활동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우리금융지주도 올해부터 3년간 총 3000억원의 ‘혁신성장펀드’를 모(母)펀드로 직접 조성하고 총 3조원 규모의 펀드로 확대하겠다고 공포했다.

정유신 한국핀테크지원센터장(서강대 교수)은 “그동안 벤처투자는 정부 모태펀드가 주도하고 벤처캐피털 위주로 움직여왔는데 민간 금융사가 직접 뛰어드니 투자 주체가 다양해져 벤처 생태계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각 금융사 스타트업 투자 성적표는

▷신한·KB 각축…우리·기업도 약진

대형 금융지주, 시중은행이 애초 직간접 투자에 나선 스타트업 분야는 핀테크다.

핀테크 육성 관련해서는 신한금융그룹이 빨랐다. 2015년 지주 산하 신한퓨처스랩을 만들고 국내 금융권 최초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출범 이후 총 1250여개의 퓨처스랩 지원 기업 중 72개 기업(4기까지)과 직간접투자, 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직접투자만 83억원에 달한다.

이를 통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스타트업도 꽤 많다. 국내 선두권 P2P 업체 어니스트펀드가 대표적이다. 한국P2P금융협회 공시자료에 따르면 어니스트펀드는 누적 대출액 순위에서 2017년 10위였던 것이 지난해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올해 3월 말에는 누적 대출잔액 4000억원도 돌파했다. 올해 3월 기준 연체율은 2.18%, 평균 수익률은 11.66%로 순항 중이다.

서상훈 어니스트펀드 대표는 “은행이 투자하던 당시보다 약 4~5배 수준으로 기업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퓨처스랩 선정 후 시장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고객, 채용 시장의 잠재 팀원, 지분투자자, 파트너사 등)로부터 빠른 시간 안에 신뢰를 쌓을 수 있어 좋았고 실무적으로는 비용 절감 외 협업 논의를 할 수 있는 상시 창구가 생겼다는 것이 큰 이점이었다”고 말했다.

그 밖에 신한이 투자해 급성장하고 있는 핀테크 업체로는 블로코(블록체인), 페이민트(지불결제), 파운트(자산관리), 크레파스(신용평가) 등이 있다.

시작은 좀 늦었지만 KB금융그룹의 뒷심도 무시할 수 없다. KB는 KB스타터스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트업을 육성하는데 지난해 말 기준 누적 투자금액은 159억원으로 오히려 신한을 앞선다. 특히 지난해 한 해 투자액만 88억원이다. KB금융지주 관계자는 “KB인베스트먼트, KB증권, KB카드 등 계열사 운영 펀드나 자기자본뿐 아니라, 지난해에 결성된 CVC펀드를 통해서도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KB를 통해 동반성장하고 있는 스타트업은 어디일까.

보안인증업체 ‘플라이하이’가 대표적이다. 안랩 출신 김기영 대표가 2015년 창업한 스타트업으로 2017년 KB스타터스로 선정됐다. 이후 KB금융그룹의 손해보험, 증권, 생명보험, 캐피탈 등과 서류 발급, 제출 등 번거로운 작업을 줄이고 인증 절차를 간편하게 만들어 고객 편의성과 업무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등기소나 주민센터, 보험사에 직접 가서 받아야 할 각종 서류를 클릭 몇 번으로 3~4초 만에 처리해주는 식이다. 이런 혁신성을 인정받아 최근 KB금융그룹의 CVC펀드로부터 10억원의 투자 유치도 확정했다. KB금융그룹은 계열사와 10건 이상의 제휴, 10억원 이상의 투자 유치를 달성한 스타트업을 ‘10-10클럽’으로 명명하는데 이번 투자 유치로 1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기영 대표는 “다양한 제휴와 지원 덕에 지난해 영업이익은 259%, 매출액은 93% 늘어나는 등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여세를 몰아 글로벌 금융사 제휴는 물론 해외 직접 진출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KB인베스트먼트로부터 투자받은 인공지능(AI) 건축설계 스타트업 ‘스페이스워크’도 눈길을 끈다. 특정 주소나 지역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부동산 시세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복잡한 건축법규를 분석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부동산 개발안을 제시하는 첨단기술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가구 수와 법정 주차 대수 등을 제공하는 ‘랜드북 인사이트 Plus(플러스)’ 기능을 선보였고 KB금융그룹과 제휴도 적극 검토 중이다.

KEB하나은행이 2015년부터 운영해온 스타트업 발굴·협업·육성 프로그램 ‘1Q Agile Lab’ 성과도 꽤 괜찮다. 지금까지 누적 기준 약 40억원의 직접투자가 이뤄졌고 이번 8기까지 총 64개 스타트업을 발굴했다.

AI 챗봇 서비스 전문 스타트업 마인즈랩은 하나은행에서 투자받은 후 서로 윈윈한 케이스다. 종전 하나은행이 텍스트로 은행 업무를 보게 했던 ‘텍스트뱅킹’을 음성 지원, 로봇 상담으로 업그레이드한 ‘하이뱅킹’ 출시 때 내부 기술 지원에 힘을 보탰다.

핀테크 외 스타트업 투자에 열을 올린 금융사도 많다.

우리금융그룹은 2017년 은행권 최대 금액인 약 630억원을 4차 산업과 청년창업 기업 등에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약 1600억원을 출자해 혁신성장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금융지주 관계자는 “주식,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각 기업에 최대 10억원까지 투자한다. 이런 소액 직접투자 방식은 국내 은행 최초”라고 소개했다. 구글, 아마존 등 인공지능 스피커와 연결 가능한 스마트 조명 제조 스타트업 ‘메를로랩’도 이런 방식으로 투자를 유치했다. 우리은행과 인연을 맺은 후 회사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올해 MWC에 나가 호평받아 주문이 쏟아지면서 연말 목표 매출액만 130억원을 내다본다. 내년에는 코스닥 상장에도 도전할 정도다.

IBK기업은행 역시 중소기업 지원 국책은행인 만큼 핀테크 스타트업으로 한정하지 않고 사업 모델이 독창적이면 투자를 집행하는 분위기다. 창업육성 플랫폼 ‘IBK창공(創工)’을 통해서다. 투자 전문인력이 차별화한 사업 모델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기수별로 선정, 투·융자, 컨설팅, 사무공간 등의 금융·비금융 서비스를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자전거 중고거래 플랫폼 업체 ‘라이트브라더스’가 이런 시스템의 대표적인 수혜 기업이다. 지난해 5월 창업한 후 ‘IBK창공’ 구로 1기 기업으로 선정, 1억원의 초기 투자금 유치는 물론 IBK기업은행으로부터 판로 개척, 경영 컨설팅 등에서 도움을 받고 있다. 김희수 라이트브라더스 대표는 “취미로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던 중 자전거 중고거래는 개인 간 직거래 방법밖에 없다는 점이 불편했다”며 “엑스레이 비파괴검사 장비를 이용해 중고 자전거의 상태를 판독하고 인증해 거래 신뢰도를 획기적으로 올려 자전거 중고거래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건설 현장 안전관리 전문 CCTV로 특화한 ‘지와이네트웍스’도 비슷한 케이스. 방승온 지와이네트웍스 대표는 “위험을 감지해 경고하는 CCTV로 차별화했다. ‘RECON 안전관리솔루션’을 쓰면 건설 현장에서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은 모습이 포착될 시 곧바로 신호를 줘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신한금융그룹도 최근에는 투자 패턴이 바뀌었다.

신한퓨처스랩 관계자는 “초기에는 핀테크 업체 위주로 선발했지만 점차 문호를 개방해 커머스(그럼에도, 팩토리얼), 헬스케어(휴이노, 송아리아이티, 날마다자라는아이) 등 점차 다양한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베트남 진출 스타트업 지원에도 나섰다. 뷰티 부문 ‘ABC스튜디오’를 비롯, 가상 제품 착용 솔루션 스타트업 ‘블루프린트랩’, 여행자·셀러들의 제품 추천 커머스 ‘와이오엘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KEB하나은행의 AI 기반 음성챗봇 ‘하이뱅킹’에 기술을 제공한 스타트업 ‘마인즈랩’(좌). KB금융그룹과 10건 이상 제휴, 10억원 이상 투자 유치로 ‘10-10클럽’에 가입한 스타트업 ‘플라이하이’.

KEB하나은행의 AI 기반 음성챗봇 ‘하이뱅킹’에 기술을 제공한 스타트업 ‘마인즈랩’(좌). KB금융그룹과 10건 이상 제휴, 10억원 이상 투자 유치로 ‘10-10클럽’에 가입한 스타트업 ‘플라이하이’.

▶투자 늘려 좋긴 한데

▷일회성·면피성 투자 아니길

“매출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올해 갑자기 여러 금융사에서 몰려와 투자하겠다, 지원해주겠다 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뭔가 급하게 떠밀려서 접근하는 느낌이었다.”

한 스타트업 대표의 전언이다.

민간 금융사 차원에서 스타트업 지원을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다만 전문가들은 투자와 지원을 각자의 철학에 맞춰 일관되게 추진해야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원 방식이나 규모가 달라지는 것은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전 금융연구원장)는 “정권 코드 맞추기로 급박하게 이뤄졌다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각 금융사가 자율성과 확실한 색깔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진짜 핀테크·스타트업 투자로 비이자이익을 늘리려 했다면 일찌감치 실리콘밸리에 지사를 내고 떠오르는 현지 벤처기업에 투자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전문성 면에서도 좀 더 보강할 요소가 많다는 시각도 있다. 정유신 센터장은 “아무래도 대형 금융사가 그간 해오지 않던 벤처투자 업무를 하다 보면 시행착오도 많이 겪을 수 있다. 기술금융 심사 등 전문성이 부족한 부분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인력 수급, 교육 등을 통해 끌어올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06호 (2019.05.01~2019.05.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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